상징적 성경해석 매일설교

상징적 성경해석
-눅 10:38-42
 성경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경해석은 '저자의 의도'를 찾는 슐라이허 마허의 해석학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오늘날에는 하나로 고정된 해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과거의 신학자들이 '저자의 의도' '편집자의 의도'를 찾고, 자신이 찾은 것을 마치 정답인양 말했던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자가 아닌 이상 누가 감히 저자의 의도라고 말할 수 있으며, 더구나 성경의 저자는 모세 등등이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감히 누가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포스트 모던 이후의 철학자들은 저자가 책(텍스트)을 쓰는 것이 아니고, 언어라는 살아 있는 세계(실체)가 먼저 존재하고, 그 세계에서 저자를 선택하여 자신의 책을 기록하게 함으로써, 저자는 창조자가 아니고 단지 창조 세계로부터 선택받은 기록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기록자라고 해서 창조자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며, 텍스트를 기록한자가 테스트에 대해서 정답이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해석을 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해석에 적용하면, 성령께서 기록자를 택하여,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을 기록했을 뿐, 모세와 같은 사람이 성경을 창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여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성경)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모세의 의도를 백날 찾아 봤자 모세 자신이 아닌 한 그 누구도 그것을 찾을 수 없으며, 또 모세가 창작한 것이 아니니, 모세의 의도를 찾아 봤자 그것이 정답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해석되어 시대의 상황에 따라 설교될 때도, 말씀하시는 이는 역시 언어 자체의 세계(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이시고, 말하는 자, 설교자는 선택받아서 그 상황에서 잠시 쓰임 받는 자 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하나님)와 아론(대언자)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성령(하나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代言(대언)'한다고 했습니다.  
 미셜 푸고와 같은 포스트 모던 철학자가 말하는 사상은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현대적인 언어로 해석하고, 체계화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살아 있고,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본문도 슬픈 사람이 읽으면 위로가 되고, 즐거운 사람이 읽으면 감사가 됩니다.
 오늘 분문은 너무나 잘 아는 성경본문입니다. 이 성경을 해석하는 일반적이고 이미 알려진 것은 일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예배부터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다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흔히 심방을 갔을 때 예배드리는 도중 주인댁이 슬그머니 부엌으로 나가서 덜그덕 거리며 예배 끝나자 마자 목사와 심방대원을 먹일 과일과 음료를 준비하는 모습을 빗대어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볼 때마다 그렇게만 본다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풍성한 의미를 다 얻지 못할 것입니다. 또 다른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상징적 해석'이란 다소 낯선 방식으로 이 본문의 또다른 얼굴을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 마르다와 마리아를 개체로서의 두 사람이라 생각지 말고,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 속에 있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겉 사람은 주님이 계신 방을 떠나 다른 일로 분주합니다. 그 자신이 주님을 위한 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입니다. 반대로 속 사람은 주님이 계신 방안에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책망하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책망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사기 시대의 사람들처럼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믿는 '자기의' 강한 성도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겉 사람의 시대입니다. 당신의 겉 사람이 오늘도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처하고, 우상노릇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겉 사람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속의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에게로 가 보시기 바랍니다.

눅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1월22일 주(속회 공과) 속회공과(설교)

11월22일 주(속회 공과)
*제목: 영적인 삶의 가치
*성경: 갈5:16-25
 신앙생활은 아무렇게나 해서 결과만 좋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한다고, 또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론의 아들들이 허락되지 않은 불로 성소의 불을 밝히다가 저주를 받았는데 이 말씀을 살펴보면, 성소에 불을 밝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아무 불이나 가져다가 밝혀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교회의 일을 할 때 많은 일을 하고,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방법이나 가져다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작도 중간도 끝도 거룩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좋은 충고가 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을 쫓아 행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령의 차원, 영적인 차원을 때로 시내산에 비추어 생각해 봅니다. 평지는 육체적인 삶을 상징하고, 산 중턱은 혼적인 삶을 상징하고, 산꼭대기 구름 속은 영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평지에 머무는 아론과 많은 백성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산꼭대기 '기도의 자리'이자, 성령(구름)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모세의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어부 베드로는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고기를 갈릴리 호수에서 잡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기를 예수님에게서 잡는 것(기도의 자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결혼해서 처음에 아기를 남편과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하나님과 갖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벳이나 마리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없이 고기를 잡을 수 있고,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삶의 의미 매일설교

영적인 삶의 의미
-갈5:16-25
 신앙생활이란 결국 영적인 생활인데 요즈음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지 않고, 혼적(知情意 와 마음)인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칸트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기독교)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것은 이성 밖에 있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아니고 단지 믿음과 요청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신앙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실제 교회에서 실천되면 '영적인 사항'들이 설교에서 다뤄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들을 기회'가 없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들음'의 기회가 차단된 것입니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칸트에게 와서 완성된 이성 중심의 인간 생활이 교회에 적용되었을 때, 근대인의 신앙은 결국은 인간의 구성요소 중에서 '영'이 소외되고, 영과 관련된 '성령'이 소외되고 주로 이성이 속한 '혼'적 신앙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학'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성 중심의 신학의 발전은 점점 초월적이면 영적인 '성령' '천국' '기적' '천사'등과 같이 영적생활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주제와 실체들에 대해서 점점 멀어지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한 때는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는 목사의 신앙을 가지고 가는데 신학대학을 졸업할 때는 무신론자가 되어서 나온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목회 현장에 나와서 목회를 해 보면 '영적차원'에서 목회하지 않으면 '학원'은 될 수 있어도 '교회'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영적인 삶과 목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가르쳐 주는 곳은 없습니다(믿을 만한 곳). 각자가 알아서 책을 보든 아니면 눈치껏 목회를 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면서 배워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데 십 년 이 십년 세월이 갑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목회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잘 모른 채 목회를 시작했다가 마칩니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한 두 사람을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은퇴의 시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목회에 대한 너무 많은 주장에 시달리다 못해,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씀에 입각해서, 교회가 성장한 목회가 가장 모범적인 목회라고 생각하자고 무언중 합의를 한 것 같습니다. 거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이 허락되지 않은 불로 성소의 불을 밝히다가 저주를 받았는데 이 말씀을 살펴보면, 성소에 불을 밝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아무 불이나 가져다가 밝혀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교회 부흥시키고 많은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방법이나 가져다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작도 중간도 끝도 거룩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성경은 목회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좋은 충고가 될 것 같습니다. 성공적인 목회자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의 차원, 영적인 차원을 때로 시내산에 비추어 생각해 봅니다. 평지는 육체적인 삶을 상징하고, 산 중턱은 혼적인 삶을 상징하고, 산꼭대기 구름 속은 영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평지에 머무는 아론과 많은 백성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산꼭대기 '기도의 자리'이자, 성령(구름)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모세의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지금 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그 속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마음을 과거나 미래에 내 보내지 말고, 시내산 꼭대기라는 현재에 머물러 오직 하나님과만 대면하는 시간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토착화의 문제 매일설교

토착화의 문제
-눅10:1-2
  시대는 동양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여년 전만 해도 그런 말이 있었지만 설마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갑짝스럽게 세계의 이목이 동양에 집중되고 실제 동양 중심이 되었습니다. 동양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언제나 서양인처럼 되고자 했던 일본은 오히려 서양과 함께 몰락해 가는 것과 같고, 동양적인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국과 중국이 동양중심의 시대에 핵을 이루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과 중국의 기독교가 이제는 세계 선교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한국에 와서 근 원형과 함께 변형이 항존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교, 유대의 기독교, 그 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무속종교'가 다 같이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이제 원하던 원치 않던 이슬람도 한국에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은 마치 모든 종교가 여기 와서 멈추는 종착역과 같고, 모든 종교가 버무려져 나름대로 색과 맛을 내는 '비빔밥' 그릇과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에서는 한 종교가 모든 종교를 다 지배하는 시대가 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는 각각의 종교가 그 원형을 보존하며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토착화가 어떻게 되어갈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미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모든 종교들은 우리식으로 토착화되어 있습니다. 다윈이 주장하는 진화론과 같이 適者生存(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종교도 그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적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고등 종교는 생존력이 강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적응하고 생존하며 발전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주로 미국에서 받아들여졌지만, 미국의 기독교와는 다른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다르게 한 것이 아니고,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땅의 형태에 맞춰서 흘러가듯이 그렇게 기독교가 흘러왔고 한국에 맞춰 있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이 토착화를 시도하려 하지만, 사실은 누군가 토착화하려 한다고 해서 기독교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종군기자의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한국에 심으셨고, 적응시키셨고, 발전시키셨는지를 세심히 살펴보고 그것을 알아내어 또렷하게 드러내고, 설명하고, 이해 가능케 하는 것이 옳은 일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토착화 신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현재 신앙에 대한 리포트와 같은 형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 자리 잡고 잘 착상되어 존재하는 모든 고등 종교는 종류와 관계없이 한국 토양에 맞게 이미 토착화, 변형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늘 저 자신이 이 시대에 태어난 '종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성령과 성도와 함께 '성령의 교인사' 시대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시고 있는지 그것을 읽어내고 그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정리하고, 보고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구경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이것이 신학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양적 토착화의 방법론으로 가장 첫 째 손꼽을 수 있는 특징이 동양 사상을 대표하는 공자가 말 것 '一以貫之(일이관지)'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는 자기 사상이자 유교의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해서 '仁(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仁(인)을 이해하면 유교를 이해합니다. 이 인이라는 한 단어를 통해서 전체를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과 한국에서 '禪(선)' 불교가 되었습니다. 話頭(화두)나 公案(공안)으로 표현되는 一以貫之(일이관지) 된 한 단어나 한 구절의 말로서 불교전체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아마 한국의 기독교도 이런 동양적이면서 한국적인 방식으로 도착화 되었을 것이며,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토착화되어 갈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지난 기독교는 一以貫之(일이관지)하여 '삼박자 구원론'을 깊이 생각해 보면 다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귀납적인 형태의 서양인과 달리, 연역적인 형태의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는 동양인들은 하나로서 전체를 다 아는 형태의 가르침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21세기에 새로운 시대를 一以貫之(일이관지)하여 하나로서 전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그 하나'의 단어, 문장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서 말씀하고 계시며,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우리를 먼저 보내신다고 할 때, 주님의 이런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듯 우리를 보내려 하십니다. 오늘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 봅시다. 이것을 알아 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성취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눅 10: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하나님 나라의 所在(소재) 매일설교

하나님 나라의 所在(소재)
-눅17:20-21
 하나님은 시간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現在(현재)'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역시 영원한 현재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시간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과거는 기억으로 미래는 예측으로 연결되는 현재를 사는 시간적 존재입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이것을 현대철학자 하이덱거는 다시 과거는 피투적으로, 미래는 기투적으로 우리 현재에 침투되어 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런 과거와 현재에 대한 생각에 이끌려 과거와 미래로 한없이 이끌려 다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가서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정확히 현재에 머물러 있을 때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생각)은 단 한 순간도 우리 마음이 현재에 머물러 있게 놔두지 않습니다. 마치 귀신이 미친 사람의 머리채를 붙들고 이리 저리 이끌고 다니듯이 우리를 이리 저리 이끌고 다닙니다.
 우리 마음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합니다. 하나님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언뜻 언뜻 스쳐 지나갑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진자운동을 할 때 잠시 현재를 스치는 그 시점에서 잠깐 잠깐 느끼는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너무 어렵게 철학적인 접근을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가을이 되니 보다 사색적이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좀더 쉽게 성경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점을 지적하여 "한 날 어제 일을 잊어버리고,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점잖게 쉽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현재에만 머물 수 있다면 그 자리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키엘케골이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말이 이 말입니다. 實存(실존)의 자리입니다. 천국의 평안함, 고요함, 침묵, 쉼, 등등의 모든 표현이 다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현재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것은 '사실'이 아니고 '생각'일 뿐입니다. 이것은 허구이고, 이것은 허상입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허상이 없습니다. 모두가 실상입니다.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는 불신자들까지 입만 열면 영성을 말합니다. 이들이 미친 듯 빠져드는 영성은 동양적 영성, 인간의 인간에 대한 영성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진아)가 자신의 가상적 자아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인디안 추장은 이것을 우리 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어 서로 싸운다고 상징화시켜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자아 분열이 실제화되는데 오래 걸리고, 자신의 자아에서 허구의 자아를 몰아내고, 眞我(진아) 혼자만 남은 데 또 오래 걸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非我(비아)는 어느새 도망친다는 것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도망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 없이 어둠인 자아가 어둠인 비아를 물리치기 어렵습니다. 40도 강추위 속에서 나무에 달아 붙은 얼음은 돌보다도 떼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새봄이 오면 따뜻한 봄볕에 얼음은 눈 녹듯 술술 녹아 사라집니다. 죽은 것과 같이 딱딱했던 나무 껍질을 뚫고 새 싹이 나옵니다. 얼음 옷을 입었던 나무가 봄의 태양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바울이 말한 "나는 죽고 예수는 산다"는 말처럼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실제 그렇게 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나 제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한 사람도 못봤고, 저도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쓸데없는 말을 써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페를롱이 말했습니다. 자신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면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죽은 척 할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속아넘어갑니다.
 달이 태양을 바라보듯이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잊혀지고, 바라보다 사랑하게 되면,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흰 눈이 내리는 넓은 벌판을 바라보면 잠시 넋을 잃습니다. 이런 상태가 천국을 바라보고 잠시 넋을 놓은 상태입니다. 이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찬송의 세계입니다. 눈을 사랑하면 눈속에 빠져들고 결국 눈속에서 죽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처음에는 넋을 잃게 되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사랑하하게 되고,  결국은 예수님속에서 죽게 됩니다.  이 번 한 주간도 주님과 함께 시작해 봅시다.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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