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적 성경해석
-눅 10:38-42
성경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경해석은 '저자의 의도'를 찾는 슐라이허 마허의 해석학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오늘날에는 하나로 고정된 해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과거의 신학자들이 '저자의 의도' '편집자의 의도'를 찾고, 자신이 찾은 것을 마치 정답인양 말했던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자가 아닌 이상 누가 감히 저자의 의도라고 말할 수 있으며, 더구나 성경의 저자는 모세 등등이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감히 누가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포스트 모던 이후의 철학자들은 저자가 책(텍스트)을 쓰는 것이 아니고, 언어라는 살아 있는 세계(실체)가 먼저 존재하고, 그 세계에서 저자를 선택하여 자신의 책을 기록하게 함으로써, 저자는 창조자가 아니고 단지 창조 세계로부터 선택받은 기록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기록자라고 해서 창조자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며, 텍스트를 기록한자가 테스트에 대해서 정답이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해석을 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해석에 적용하면, 성령께서 기록자를 택하여,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을 기록했을 뿐, 모세와 같은 사람이 성경을 창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여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성경)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모세의 의도를 백날 찾아 봤자 모세 자신이 아닌 한 그 누구도 그것을 찾을 수 없으며, 또 모세가 창작한 것이 아니니, 모세의 의도를 찾아 봤자 그것이 정답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해석되어 시대의 상황에 따라 설교될 때도, 말씀하시는 이는 역시 언어 자체의 세계(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이시고, 말하는 자, 설교자는 선택받아서 그 상황에서 잠시 쓰임 받는 자 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하나님)와 아론(대언자)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성령(하나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代言(대언)'한다고 했습니다.
미셜 푸고와 같은 포스트 모던 철학자가 말하는 사상은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현대적인 언어로 해석하고, 체계화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살아 있고,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본문도 슬픈 사람이 읽으면 위로가 되고, 즐거운 사람이 읽으면 감사가 됩니다.
오늘 분문은 너무나 잘 아는 성경본문입니다. 이 성경을 해석하는 일반적이고 이미 알려진 것은 일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예배부터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다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흔히 심방을 갔을 때 예배드리는 도중 주인댁이 슬그머니 부엌으로 나가서 덜그덕 거리며 예배 끝나자 마자 목사와 심방대원을 먹일 과일과 음료를 준비하는 모습을 빗대어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볼 때마다 그렇게만 본다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풍성한 의미를 다 얻지 못할 것입니다. 또 다른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상징적 해석'이란 다소 낯선 방식으로 이 본문의 또다른 얼굴을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 마르다와 마리아를 개체로서의 두 사람이라 생각지 말고,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 속에 있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겉 사람은 주님이 계신 방을 떠나 다른 일로 분주합니다. 그 자신이 주님을 위한 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입니다. 반대로 속 사람은 주님이 계신 방안에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책망하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책망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사기 시대의 사람들처럼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믿는 '자기의' 강한 성도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겉 사람의 시대입니다. 당신의 겉 사람이 오늘도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처하고, 우상노릇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겉 사람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속의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에게로 가 보시기 바랍니다.
눅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10:38-42
성경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경해석은 '저자의 의도'를 찾는 슐라이허 마허의 해석학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오늘날에는 하나로 고정된 해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과거의 신학자들이 '저자의 의도' '편집자의 의도'를 찾고, 자신이 찾은 것을 마치 정답인양 말했던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자가 아닌 이상 누가 감히 저자의 의도라고 말할 수 있으며, 더구나 성경의 저자는 모세 등등이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감히 누가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포스트 모던 이후의 철학자들은 저자가 책(텍스트)을 쓰는 것이 아니고, 언어라는 살아 있는 세계(실체)가 먼저 존재하고, 그 세계에서 저자를 선택하여 자신의 책을 기록하게 함으로써, 저자는 창조자가 아니고 단지 창조 세계로부터 선택받은 기록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기록자라고 해서 창조자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며, 텍스트를 기록한자가 테스트에 대해서 정답이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해석을 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해석에 적용하면, 성령께서 기록자를 택하여,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을 기록했을 뿐, 모세와 같은 사람이 성경을 창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여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성경)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모세의 의도를 백날 찾아 봤자 모세 자신이 아닌 한 그 누구도 그것을 찾을 수 없으며, 또 모세가 창작한 것이 아니니, 모세의 의도를 찾아 봤자 그것이 정답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해석되어 시대의 상황에 따라 설교될 때도, 말씀하시는 이는 역시 언어 자체의 세계(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이시고, 말하는 자, 설교자는 선택받아서 그 상황에서 잠시 쓰임 받는 자 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하나님)와 아론(대언자)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성령(하나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代言(대언)'한다고 했습니다.
미셜 푸고와 같은 포스트 모던 철학자가 말하는 사상은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현대적인 언어로 해석하고, 체계화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살아 있고,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본문도 슬픈 사람이 읽으면 위로가 되고, 즐거운 사람이 읽으면 감사가 됩니다.
오늘 분문은 너무나 잘 아는 성경본문입니다. 이 성경을 해석하는 일반적이고 이미 알려진 것은 일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예배부터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다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흔히 심방을 갔을 때 예배드리는 도중 주인댁이 슬그머니 부엌으로 나가서 덜그덕 거리며 예배 끝나자 마자 목사와 심방대원을 먹일 과일과 음료를 준비하는 모습을 빗대어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볼 때마다 그렇게만 본다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풍성한 의미를 다 얻지 못할 것입니다. 또 다른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상징적 해석'이란 다소 낯선 방식으로 이 본문의 또다른 얼굴을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 마르다와 마리아를 개체로서의 두 사람이라 생각지 말고,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 속에 있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겉 사람은 주님이 계신 방을 떠나 다른 일로 분주합니다. 그 자신이 주님을 위한 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입니다. 반대로 속 사람은 주님이 계신 방안에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책망하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책망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사기 시대의 사람들처럼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믿는 '자기의' 강한 성도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겉 사람의 시대입니다. 당신의 겉 사람이 오늘도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처하고, 우상노릇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겉 사람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속의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에게로 가 보시기 바랍니다.
눅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최근 덧글